글 옮기기의 일환입니다.
저는 iRiS nX하고 싸이 미니홈피만 훑으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근데 옛날 홈페이지에 썼던 글 중에 안 옮긴 게 있더라구요. 그래서 일이 늘었다는 겁니다.

이건 두 번째 홈페이지에 올라간 글 중 하나입니다.
보링토크라고 분류를 달아서 쓴 건데, 블로그 쓰듯 계속 쓰려고 했지만 세 개 밖에 없어요.

홈페이지(구), 날개의 꿈- Boring Talk, 2001-12-28

==========

어느 입시 문제집의 서문

  8월, 9월, 아니면 10월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집을 한 권 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서문을 읽어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니, 아니. 이런건 이해도가 좀 떨어질지도 모르겠군요. 별로 세련되지 못한 수법이긴 합니다만, 일단 대조구부터 한 번 보도록 하죠.

  - case 1

  살아가면서 아픔과 시련으로 우리는 힘들어하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아픔과 시련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종종 깨닫곤 하지요. 아픔과 시련, 그 속에는 단지 그것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열매가 더욱 튼실한 것처럼 젊은 시절에 가슴 깊이 새겨진 아픔과 시련은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나씩하나씩 찬란한 보석이 되어 우리 인생을 더욱 튼튼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필자들은 여러분이 그 아픔과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지혜로운 동반자가 되기를 비라며 이 책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감을 가지고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 지은이

  노말하지요. 적당한 문학적 소양 내지는 청소년적 감수성이 드러난 책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만, 아무튼). 어쨌거나 이정도면 적당하겠지요. 자주 보입니다, 이런 타입은.

  - case 2

  2002 수능의 난이도 및 출제 지침에 맞춰 100% 신출제로 적중도 제고 2002 수능 시험은 상위 50% 집단 평균 77.5±2.5점 수준이 되도록 난이도를 높여 어렵게 출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2 수능부터 등급제를 도입하는 등 수능이 확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XXXX는 30% 내외의 교체로는 2002 수능 대비가 부족하다고 절감하면서 100% 새로운 원고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러한 난이도와 2002 출제 지침에 맞춰 새로운 필자의 새로운 원고로 개발한 〈XXXX 수능총정리〉는 2002 수능의 적중도를 더 높입니다.
  편리성과 적합성을 더 높인 XXXX식 퍼펙트 해설 도입 XXXX는 책을 개발할 때 가장 높은 학습 효과와 가장 편리한 학습 체제를 늘 생각합니다. XXXX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책속의 책〉, 해설 속에 띄워져 있는 〈문항 윈도우〉,〈복구 프로그램과 심화 프로그램〉. 이 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학습의 흥미와 재미를 함께 줄 것입니다.
  교육 출판을 선도하는 XXXX의 또 한발 앞서가기 XXXX〈수능총정리〉를 펼쳐보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깜찍한 미니북, 그리고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실명제 등 XXXX가 첫발을 내딛는 순간, 교육 출판계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혜택을 누리는 첫 세대입니다.

  (일부 부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실용주의 노선' 이라고 해야할지, 'GURA' 라고 해야할지 좀 아리송하군요. 적중도 운운하는 부분은 결과론적으로는 'GURA'임이 입증됐...군요. 이것도 물론 흔한 타입입니다.

  방만한 곁길 빠지기는 그만두고 본론으로 말을 돌려볼까요. '그런데...' 다음에 올 케이스는 이겁니다.

  - case 3

  무경지의 비성숙을 조금씩 내려다 볼 것ㆍ손가락들이 지칠 때까지 운명을 보듬을 것... 마지막으로 소쩍새의 비통함을 음미할 것...
  그렇습니다. 임계 속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날지 못하는 밀랍의 날개는 운명이지만, 그 날개를 퍼덕거리지 않는 것은 타락입니다. 진리(眞理)의 절대성은 오만이지만, 일리(一理)의 보편성은 겸손입니다. 배움은 항상 새로움의 출발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날개짓의 퍼덕거림입니다. 슬픔에 겨워 알음알이를 깨치고, 슬픔을 못 이겨 알음알이를 깨뜨립니다. 존재에서 성숙으로, 성숙에서 깨우침으로, 깨우침에서 삶으로, 삶에서 다시 존재로, 여러분! 열정(passion)은 다름 아닌 수난(passion)입니다. 수난이 주는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우울해질 뿐입니다. 하나의 이치(理致)를 찾아가는 열정이며 수난이며 기쁨을 위하여...
  - 지은이

  이걸 보고 3초후에 느낀 점은...

  문학소년...

  설마하니 8절 입시 문제집 서문에서 이런 글을 발견하게 될줄이야.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의외의 요소라는 것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겁니다(참고로, '파이널종합 사회탐구영역' 이라는 이름의 문제집이었습니다. 차라리 언어영역이면 제가 이해를 하죠).
  지은이중 (최소한)한 분은 꿈많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문학소년(소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문제집 서문에서나 문학적 소양을 발휘할 수 있는 한국의 현실은 슬프군요(뭔가 이런 얘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ps : 셋 다 같은 회사의 문제집이군요.

==========

2001년 말에 올린 거니까 재수 끝날 때긴 한데, 아마 고3때 푼 문제집 갖고 한 걸 거예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셋 다 블랙박스였습니다. 그러니까 저 위의 'XXXX'는 '블랙박스'인 거예요.

그럼 다같이 소쩍새의 비통함을 음미해봅시다그려.
2008/05/06 01:28 2008/05/06 01:28

트랙백 주소 :: http://www.scrapheap.pe.kr/TT/01/trackback/122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GB 2008/05/07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시험은 잘 봤으니 되었잖냐.
    (GURA든 아니든) :D

  2. 지구 2008/05/09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웃어야할지 감동해야할지.. 아니 감동했지말입니다
    누군가가 알아봐주기를 바라며 열심히 쓰셨을 것 같아요^ㄴ^

    • ScrapHeap 2008/05/10 0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저 분 자기 직업에 만족하진 못 하셨을 듯도 해요.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저걸 능가하는 서문을 발견해버렸어요.
      이용식 저 "현대 형법 이론"(박영사)입니다. 사실 실물은 못 보고 서문만 봤...(...)

  3. 김이슬 2008/05/17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명을 쓰지 않으면 못 알아보실 것 같아 굳이 실명을 쓰면서 뭔가 오묘한 기분이군요.
    힘들게 그 '서문'이란 것을 찾아왔습니다. 왠지 경쟁 심리에;;
    하지만 뭐 싱거운 저의 (이용식 선생님의?) 한판승이로군요. 푸흡.
    너무 강자를 만나버렸어요.
    문학소년께서도 꽤 하고 계십니다만은;
    (날지 못하는 밀랍의 날개라니... 밀랍이란 단어를 들어본 것만도 얼마만인지;;)

    • ScrapHeap 2008/05/18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소이까. 상대가 안 돼.
      근데 고3이나 재수할 때라는 특수상황에 저런 서문을 보면 나름 임팩트가 있다는 건 인정해주시압.

      현대 형법 이론 사야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