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홈피] 2004-09-01, 걷다

글/기타 2009/11/02 19:41 ScrapHeap
어느새 11월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참 주책없네요. 가 닿는 곳에 누가 기다리길래 이리 빨리 흐르는 걸까요.
라는 식으로 약간 센치한 척을 하면서, 사실은 추위에 달달 떨고 있는 주인장이 옛날 글을 올립니다.

이번엔 오랜만에(대략 반 년 만에)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있는 글을 옮깁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미니홈피죠.

싸이월드 미니홈피, 게시판-부자유게시판, 2004-09-0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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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2004.09.01 20:38

무작정 집을 나왔다. 머리를 깎고는 떠오르는 것도 없고 해서 동대문에 갔다. 만화책을 몇 권 샀다. 살 건 많은데 지갑은 어느 새 비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일부러 한 정거장 지나쳤다. 성내역 옆의 아파트는 철거중이었다. 살아본 적도 가 본적도 없었는데 이유없이 무언가 가슴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역을 나서서 걸었다. 강을 찾았다. 다리를 찾았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 올림픽대교에는 인도가 있어서 좋았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쳐가면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길이 좀 좁기는 했다.

아아, 강이란 건 좋구나.

강바람이 거셌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커다란 다리는 덜컹거리면서 흔들렸고 귀에 얹어놓은 헤드폰에서는 DOC와 데이브 브루벡 쿼텟과 크라잉넛이 메아리를 쳤다. 강이 넓어서 좋았다. 어쩌면 수평선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결국 못 보았지만. 얼마 전에 무작정 바다를 보겠다고 떠났던 생각이 났다. 그 때보다 오히려 더 무작정 돌아다닌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아, 또 시간을 이렇게 낭비해버리고 말았구나. 낭비한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묘한 쾌감이 기분 좋았다. 무작정 사진을 찍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학교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참 모범생이었다. 사고 결석은 하루도 없고 12년 개근인 그런 애였다. 이제 와서야 다들 학교 갈 때에 하루종일 밖을 열없이 걸어보기도 하고 그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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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센치한 느낌으로. 이래저래 마음이 붐비던 시기였으나 대체로 만족스러운 결론이 났네요.
그래봤자 살고 있는 이상 마음 붐빌 거리는 계속 날아오게 마련이지만요.

근데 지금 읽어보면 중학생이 가출이라도 한 느낌이네요. 대학교 다닐 때였는데. 큰일이야.
2009/11/02 19:41 2009/11/0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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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B 2009/11/02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우, 그냥 막 오글거려서 좋다.
    나라면 예전에 삭제해 버리고 그런일 없다는 듯 굴텐데 말이지. (다들 기억하고 있을테니 소용 없지만서도)
    그런데 저 마음 붐비는 일이란건 성적 얘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