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문제

글/IT 2010/04/22 00:20 ScrapHeap
아마 제가 인터넷을 시작한 것은 2000년이나 1999년쯤이었을겁니다.
그 조금 전에는 하이텔에서 잠깐 활동을 한 적이 있었지요(TCG나 TRPG동이었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일단 실명이나 직업 같은 것들을 밝히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라인의 나/온라인의 나는 뿌리는 같으나 같은 존재라고는 할 수 없고, 이른바 사이버스페이스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는 유리된, 또는 현실을 초월한, 그도 아니면 그냥 현실이 아닌 무언가였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잘 살았습니다. 재미있게요.

조금 생각해 볼 것은 카페나 클럽이라고 하는 커뮤니티 서비스입니다. 오프라인 세계의 인간관계에 기반한 커뮤니티(대학교에서 만드는 반 카페, 조 카페 같은 것)는 오프라인의 연장입니다. 실상 오프라인 생활을 서포트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지요. 모여서 찍은 사진을 공유한다든가, 숙제 게시판으로 쓴다거나.. 반면 오프라인과는 별 상관이 없는 커뮤니티들은 오프라인의 인간과 별 상관 없이 돌아갔고요. 물론 그런 모임이 번개로 발전하기도 하고, 회원들끼리 오프라인상으로 친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했지만요.

싸이월드 미니홈피. 미니홈피는 상황 변화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실명 기반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서비스. 이것은 오프라인의 나/온라인의 나를 구별하는 이분법을 부정하는 서비스입니다. 물론 오프라인 관계를 서포트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오프라인상으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온라인을 통해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통로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대표적인 것이 싸이 허세글입니다).

그러나 싸이월드는 미니홈피라는 개인의 거점을 제공하고 그 거점에서 일촌수와 댓글이라는 형식으로 영향력을 수집하며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거점에 방문해야(일촌 순례) 하는, 지극히 정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제공하는 데 그쳤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블로그의 발달. 블로그는 그 자체로서는 오프라인/온라인의 정체성 구별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비실명으로 운영하던 '홈페이지' 의 대체물로서 사용되기도 하고, 오프라인의 자신이 쓴 글을 확산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글을 쓰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적으로 동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보급했다는 것입니다. 내 거점에 쓴 글을 상대의 거점에 링크로 보내는 트랙백, 굳이 거점에 방문하게 하지 않고도 영향력을 발산할 수 있는 RSS. 영향력을 수집/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나름대로) 대중화되었습니다.

여기서 트위터 등등이 나오면 될 것 같은데요, 트위터는 성질상 일상을 공유하는 서비스(일상을 공유하기만 하는 서비스라는 뜻은 아닙니다!)입니다. 일상 공유란 대부분의 경우 오프라인의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발달한 동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주고받습니다. 내 거점에 글을 쓰고, 답글을 쓰고, 남이 쓴 답글을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굳이 내 거점에 방문하게 할 필요도 없이 내가 쓴 글을 내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보내고, 남이 쓴 글중에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도 실시간으로 쏴보냅니다. 온라인으로 확산되는 오프라인의 나랄까요. 하지만 사람의 일부는 그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인 법이니 이걸 단순히 오프라인 정체성이 온라인 정체성을 밀어낸 것이라고 보면 안 될 겁니다.

이에 더불어 일상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서나 글이든 사진이든 웹으로 보낼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상의 공유는 점점 더 오프라인 생활에 밀착하게 됩니다.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침식해 갑니다. 그와 동시에 증강현실로 대표되는 오프라인 정보를 이용한 온라인 서비스(어찌 보면 증강현실은 이와 정 반대일지도 모릅니다만)가 활성화됩니다. 지도를 웹에서 서비스하고, 맛집 정보를 덧붙이고, 사진을 웹에 올리면서 찍은 장소의 지도에 붙이고, 심지어 웹상으로 오프라인 세계의 땅따먹기를 하면서 놉니다(foursquare : 소개글). 오프라인이 온라인을 침식해 갑니다.

여러 방향으로, 오프라인 세계와 온라인 세계는 뒤섞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맛집을 찾아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 가서 인터넷에 올라온 도전 과제(이 메뉴가 맛있다)를 클리어하고 달성률을 올리는, 더군다나 달성률을 많이 올린 사람에게는 식당에서 서비스 메뉴까지 주는 뒤죽박죽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트위터를 제대로 써 보기로 하고 위젯을 블로그에 달았습니다. 트위터에는 실명으로 가입했기 때문에 이제 실명이 이 홈페이지에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정체성을 구별하던 제 입장에도 금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그냥 놀이로 끝날지, 아니면 정말 대단한 놀이 또는 놀이도 아닌 무언가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제 정체성의 변화는 시작된 것 같습니다.
2010/04/22 00:20 2010/04/2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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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B 2010/04/23 0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명을 내놓는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한 방에 훅 갈만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사실 문제가 없긴 하지비? 그래도 좀 놀라긴 했다.

    요즘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없어도 잘 살겠구만 왜 저리 안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때가 있지 뭐야.

    음...확실히 이런 디지털 쪽에서 멀어지니까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실상 그리 멀지도 않구만. 흠흠흠.

    • ScrapHeap 2010/04/23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확하다. 없어도 잘 살지.

      온 세계를 관통하는 '시대' 같은 건 이제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전화처럼 없으면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이 올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주변 친구가 다 트위터를 한다면 안 하고 살긴 힘들거야. 메신저랑 비슷하게 말이지...

  2. 서린언니 2010/05/01 0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더라구요.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일기를 쓰지, 매일 일 휴일엔 빨래 청소...
    연예프로도 안보고 유행도 모르니 사람들과 얘기거리도 없고 ;

    • ScrapHeap 2010/05/02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행의 가장 무서운 점이 그게 아닌가 싶네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접해야 한다는 거...

      그래도 꿋꿋하게 TV 안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트위터는 소셜 네트워크라기보다 뉴스 미디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네요. 지그도 그럼 느낌으로 쓰고 있고. 쓰기에 따라서 여러모로 활용 가능한 툴 같습니다. 쓸 의지가 있을 때 얘기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