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하루 두 개씩 올릴 생각이었는데 좀 들쭉날쭉했습니다.
아무튼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하나.

싸이월드 미니홈피, 게시판-부자유게시판, 2004-10-1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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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Dazzling"

며칠 전에 왼쪽에 나오는 자기소개를 바꿨다. 한 순간 생각난 단어였다. Dazzling. 눈부셔. 순간 묵은 기억이 왈칵하고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나는 과자맛을 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떠올릴 수는 없지만, 맨날 머릿속에서 굴리곤 하던 단어를 실제로 쓰고 나니, 뭔가 팍하고 기억들이 떠올라 왔다.

보통 이런 때 떠오르는 기억은 불완전하다. 몇 개의 장면들이 떠오르고, 그걸 보면서 느꼈던 기분이 떠오른다. 어디에서, 무엇에서 봤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 순간 괴로워진다. 두개골 안쪽이 간지러운 느낌이랄까, 기억나기 전까지는 아마 잠도 잘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진짜 재미있다. 괴이쩍은 일이다.

【기차에 타고 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컴파트먼트나 좌석, 둘 중 하나다. 자리 네 개가 마주보고 있다. 창 쪽에 앉아있는데, 맞은 편에 앉은 노부인이 말을 걸어온다.

"It's Dazzling"
"예?"

영문을 알 수 없다. 눈이 부신다고? 그래서?

"Dazzling"

약간 알 것 같다. 서둘러 창문에 붙은 햇빛가리개를 내린다. 이 노부인은 손을 움직이는 것보다 입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져있나보다. 귀부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단정하되 검소한 옷차림과 고용인 하나 없이 기차에, 그것도 나와 같은 보통칸에 타는 것으로 보아서는 귀부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 귀부인인걸까. 집안은 몰락하고 가문의 부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기품과 예절은 남아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굳게 다문 입술과 완고한 표정이 그 추측에 확실성을 더해주는 듯하다.】

여기까지. 어디서 봤나? 영화인가? 요즘 영화를 좀 많이 본 편이긴 하지, 근데 요즘 본 건 아니고... 꽤 예전부터 남아있는 기억. 어디서였을까? 재미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게다가 끝에 나온 답의 의외로 멋진데 잊혀져있던 것이라면 보물이라도 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근데 생각보다 빨리 답이 기억나버렸다. 마스터 키튼이다. 만화책이다. 순간 약간 실망했다. 분명 그 부인은 자기 집안 얘기를 하고... 키튼은 끝까지 듣고 나서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부인을 가짜라고 말한다.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키튼은 기차에서 내린다.

기분 나빠지고 말았다. 키튼이라면 집에도 있고 까먹은 적도 없으니 별로 신선하지가 못하다. 게다가 가짜였잖아. 그 부인. 만화책 펴서 확인해보기도 귀찮다. 18권까지 있는데 몇 권째인줄 알고 그걸 찾아보나. 재미없구만.

여기까지가 며칠 전의 얘기, 옆에 Dazzling이라고 쓴 날의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 글을 쓰면서 그 만화 뒷얘기가 생각났다. 그 가짜 귀부인은 귀걸이를 답례로 키튼에게 주었는데, 키튼은 이것도 가짜다- 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보석상에 가서 확인해보니, 세상에나 노부인이 말한 가문 이야기에 등장하는 진품 보석이었던 것이다. 그 노부인이 가짜 귀부인이라고 주장하고, 증명을 해내고, 노부인은 그에 반론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 부인은 진짜 귀부인이었다! 순간 멍해진 키튼. 나도 잠깐 멍해졌다.

그래서 재미없고 기분 나쁘다는 앞의 의견을 철회한다. 역시 단어 하나로 촉발된 기억을 더듬어나가는 여행은 재미있다. 그리고 나는 또 눈이 부실 때마다 Dazzling이라는 단어와 동유럽의 한 귀부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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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나오는 자기소개' 란 건 싸이월드 미니홈피 왼쪽에 적는 짤막한 글을 말합니다. 카운터, 오늘의 기분, 프로필 컷 아래에 나오는 거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으로 보자면


그리고, 찾아보니 2004년 10월 10일자 자기소개글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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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zzling

Alter ego -
http://crap.x-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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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름대로 재미있네요.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거의 잊고 있었거든요. 물론 지금도 Dazzling이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마스터 키튼 생각이 나고, 그 부인이 진짜라는 것도 기억을 합니다. 그렇지만 저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러니까, 반쪽만 기억났다가 책을 다시 보고 나머지 반쪽을 알아냈다는 것은 기억이 잘 안 나요.

옛 글을 뒤적이는 일은 발굴과도 같군요. 대체로 쑥스럽다는 점은 다르지만, 놀라운 의외성이 있다는 점은 같아요. 정말로.
2008/02/18 18:20 2008/02/1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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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B 2008/02/18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생각나는건 '다즐링 티'

    스스로의 무식함을 탓하고 있지.

    ...워쩐디야..OTL

    • ScrapHeap 2008/02/18 1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괜찮아. 나 다즐링 철자 못 외우거든. Darjeeling이든가?

      ...음. 검색해보니 맞네. j를 z로 고쳤다가 다시 j로 고친 것은 나만의 작은 비밀.

      철자 알든 모르든 아무 상관 없지만...